∨ 본 글은 시인 서덕준 님의 '밤은 죄가 없다'와 '별의 자백'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위 시의 원문에 해당하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으며, 내용 또한 연관되었음을 알립니다 ;-;
동지섣달
스무닷세
written by 흑태
드높은 흰 산의 마루에 걸린 하얀 달이 외딴 언덕을 비추었다.
곁에 검은 도롱이와 커다란 자루를 두고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태형이 볼을 스쳐 흘러가는 시원한 밤공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 드높은 줄 모르고 뻗어나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하나씩 떠오른 별들이 가득한 별하늘. 죄를 덮기 위해 들이치는 파도를 억겁이라는 시간 동안 인내한 바닷조개의 진주가 흩뿌려진 것 마냥 새하얀 미리내가 흐르는 그런 별하늘이 속삭이는 소리가 고요에 젖어있던 그를 깨웠다. 태형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서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추운 계절이 도래한 북쪽을 향해 서서히 흘러가는 검은 구름을 향했던 그의 시선은 이내 아찔하게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왜 오늘도 어김없이 밤은 오는 것이냐
왜 꽃 대신 늘 어둠이 먼저 피는 것이냐
겨울을 따뜻하게 나기 위해 둥지를 가꾸던 직박구리의 지저귐조차 멎어버린 고요는 지독하도록 짙었다. 매양 곁에 머물러주는 벗이라 생각했던 이 고요가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밤을 홀로 나며 산마루 아래의 은은한 빛 그득한 고을을 내려다보는 태형의 눈빛이 근심으로 가득했다. 비탈길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서늘한 바람에 들썩이는 두루마기를 흐트러지도록 놔두는 그의 눈가가 희미하게 흔들거렸다. 나를 알지 못하는 너를 사랑한다. 이전부터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한 청년의 생각에 태형은 한겨울의 정적조차 외롭다 느낀다. 자신의 쓰라린 감정이 쏘아 올린 하나의 별들이 모여 피워낸 밤의 끝자락은 유독 어둡기만 했다. 한순간의 여흥만을 위해 맺어진 수많은 들꽃의 꽃봉오리와는 달리 지조와 절개로써 겨울에 피어나는 매화보다 일찍 깨어난 어둠을 질책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깊은 근심이 서린 입김을 불어냈다. 제 곁에 놓여있는 자루에 손을 가져간 태형은 보드라운 비단의 감촉에 괜히 쓸쓸한 마음을 떨쳐내고자 간질거리는 손끝으로 자루의 입을 매만졌다.
"임자. 낯빛이 창백하지 않소. 마른 등허리를 다독여줄 것은 하늘에 뜬 저 달과 별들이 전부면서 그대에게는 과분한 업을 안고 있구려."
"매양 달래어 주는 것만 하다 자네의 꾸중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네."
"그래. 할 곳은 저 달 저 별 밖에는 없으면서 임자가 미처 고하지 못한 고충은 무엇인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감긴 채 하늘거리는 새빨간 실을 바라보던 태형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루를 베개 삼아 누워있는 지민의 물음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고충이라. 뭐. 이것도 나름 고충이겠지. 작은 손바닥으로 자신들을 비추는 달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고충을 털어놓으라 말하는 지민에게 이제는 되었다고 하며 손사래를 친 태형이 헤픈 미소를 지었다. 태형의 미소가 드러나는 순간 느껴지는 이유 모를 두려움을 알아차린 지민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태형의 미소는 곧 그의 속내에 가득한 공포를 숨기기 위한 것. 공포를 먹고 자라나는 자신의 앞에서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두려움을 숨기려 하는 태형의 헤픈 태도에 지민은 그를 등진 채 입을 열었다.
"그 아이로군?"
"박지민."
"여즉 존재하지 않았던 인연. 이것은 매우 위태롭고도 아쉬움 많은 애정이로다. 과연 임자가 그토록 목을 멘 아이임이 틀림없구려. 하여 임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비록 예로부터 밤은 죄가 없다고 하였으나 이토록 죄 많은 이의 진심을 품고 있는 별이 밤하늘에 그득하니, 매양 쌓여만 가는 근심에 하늘이 무너질 지경이오."
"차사 정호석이 그리 전하라 하던가?"
"아아, 알겠네. 임자에게 찾아온 이유를 알려줄 것이니 표정 풀게. 금일이 끝마치기 전에 그 아이가 이 길을 지나갈 것이니 임자는 알아서 하시게나."
태형은 자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람처럼 흩어져 버리는 지민의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과연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인세에 뿌리내린 채 인간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양분 삼아 성장해 온 어둑서니의 판단다웠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단번에 간파당한 이의 씁쓸함을 느끼며 태형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령한 존재와 사랑에 빠진 인간은 단명하는 법. 이 붉은 실이 아이와 자신을 둘렀다 하더라도 쉽게 진심을 드러내며 사랑을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안쓰럽기도 하였으나, 그런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아이가 스스로의 욕심 탓에 요절할까 두려웠다.
직설적이지 않아도 나름대로의 따끔한 충고를 해준 뒤 사라져버린 지민의 고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서늘한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왔다. 속이 간지러웠다. 원수지간에 놓여있는 남녀를 이어줄 때에도 단 한 번의 흔들림조차 없었던 이 식어버린 마음이 고작 한 아이를 생각했다는 것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자신이 진솔한 감정을 밖으로 내어놓으면 그것을 주워들은 누군가가 그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만 같았다. 태형의 속앓이가 길어짐에 따라 간지러운 감정은 따가운 가시를 세웠다. 차라리 포기라도 하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그를 향한 것은 이미 오랜 세월을 이어온 연모의 정이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감정은 서툰 사랑으로 무너지는 인간사의 수많은 이야기를 직접 경험했던 태형조차 무너뜨리는 가장 서글픈 사랑이었다.
그 아이가 나를 알게 되는 순간 이 어리석은 사랑은 파국에 이를 테지. 동상에 잘려나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새끼손가락을 하염없이 매만지던 태형은 불현듯 입술을 깨물며 왼손에 힘을 가했다. 이를 악 문 채 새끼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붉은 실을 잡아당기던 태형은 점점 커져만 가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신음을 삼키고 또 삼키기를 반복했다. 자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것을 자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붉은 실을 잘라버린다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아이를 영원히 마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인간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달에서 인세로 내려왔던 태형은 그저 고통을 감내하며 아이와 마주하거나 그가 타인과 연이 맺어지기를 기도하던 월하예인. 그는 이미 하늘의 뜻을 저버린 탓에 지민과 맺은 계약 없이는 인세에서 살아갈 수 없는 한낱 나그네에 불과했다.
"정국아."
두려움으로 가득 찬 속을 좀먹어가는 지민의 어둠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 태형은 전생의 연도 없을뿐더러 자신의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한 아이의 이름을 괜히 불러보았다. 직박구리가 잠든 북쪽 숲은 그렇게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자신의 외침이 여느 나무에 부딪혀 제 귓가로 흘러들자 태형은 입술을 굳게 닫아버렸다. 심란한 마음을 보살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집스럽게 제 새끼손가락을 옭아매고 있는 붉은 실을 매만지는 것. 다 닳아버린 지문이 새겨진 손으로 붉은 실을 덮어버린 태형이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사랑해."
상처 가득한 가슴을 비집고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다급히 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태형은 모든 기운이 다 한 모습으로 힘겹게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초점을 잃어가는 서글픈 눈동자는 그 주인의 진솔한 마음을 훔쳐 달아나버린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응시했다. 나를 알아선 안 되는 너를 사랑한다. 가빠지는 호흡을 다스리기 위해 가슴팍을 덮고 있던 두루마기를 부여잡은 태형은 미동조차 없는 별하늘의 변화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엽이 뒤섞인 겨울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불안정하게 반짝이는 미리내 아래로 매우 작은 형체 하나가 호선을 그리며 하늘로 떠오른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현상은 하늘에 대고 공연히 사랑한다 외치던 태형의 염원이 새로운 별 하나를 만들어낸 것. 죽음이 있기 전에 태어남이 있는 것처럼, 고통이 가득한 태형의 외침에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초신성이 그의 오랜 근심을 품고 있는 미리내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밤하늘에 너를 사랑한다 외치는 나의 목소리가 들리느냐
서서히 기울어가는 이 내가 너를 연모한다는 마지막 단말마 말이다
정국은 자신의 손 아래 부부의 인연이 맺어졌던 한 신선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난 아이였다. 음기가 가득한 시기에 인간과 신령한 존재 사이에서 난 사내아이라는 이유로 몸이 유독 약했던 자식을 염려하던 여인과 맺었던 약조를 떠올린 태형은 헛웃음을 삼켰다. 한때에는 연모의 정을 품었던 그 여인의 처지가 불쌍하다 생각했던 그 당시에는 그 감정이 정국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이어주던 인연이라는 붉은 실이 이토록 자신을 아프게 할 줄 몰랐던 것이었다. 자라났을 때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시절까지만 정국의 곁에서 연모의 정을 배워나가던 태형은 그렇게 정국의 나이가 둘이 된 날부터 그를 떠나 하늘에 별을 하나씩 쏘아 올린 것이었다.
때로는 너의 어미가 부러웠다
지아비의 지극한 사랑을 누릴 수 있음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너를 곁에 두고 사랑을 말할 수 있음이 정말 부러웠다
차라리 그때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때 정국의 새끼손가락을 제 손가락과 엮지 않았더라면. 위태롭게 흔들리는 달빛에 태형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 자국이 반짝거린다. 다 곪아버린 마음은 고름조차 메말라 쩍쩍 갈라졌다. 서글픔을 토하기 위해 울부짖었던 수많은 나날들이 태형의 기억을 스쳐 지나가며 다시 한 번 그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사랑한다는 말 뒤로 숨겨두었던 슬픔이라는 감정. 그 감정 하나가 자신을 이토록 좌우하고 있다는 것에 그는 알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한껏 억눌렀던 그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가 수많은 별을 쏘아 올렸지만 그것이 떠나간 마음은 텅 빈 채 그 주인을 끊임없이 재촉했다. 어서 정국을 찾아가 마음을 고백하라. 그것조차 할 용기가 없다면 스스로 붉은 실을 잘라 그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라. 하지만 그에게는 그 어떠한 선택지조차 편안히 안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별이 피었구나."
너도 이 별을 보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자신이 이어준 인연 중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을 나누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서 난 아이, 정국을 남 몰래 보살피고는 했던 태형은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와 홍연이 이어져 버린 스스로의 처지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조차 무릉으로 떠나버려 여느 양반 가 * 家 의 양자로써 자라난 정국이 홀로 걸어왔을 길을 생각하면 그 헛웃음조차 울음 섞인 탄식으로 변해버린다.
또다시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 태형은 도롱이를 쥔 채 한참을 검게 가리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곧 정국이 제가 있는 길을 지나갈 것이라 하던 지민의 말을 상기해낸 그는 힘없이 상체를 움직였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하겠군. 지민이 제게 했던 물음을 되새기며 느릿느릿 도롱이를 접던 태형은 이내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어 언덕 너머를 응시했다.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빨갛게 달아오르는 붉은 실이 어렴풋이 제 인연이 오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서 도망치듯 사라져야 한다는 이성은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 한 서린 연모의 정에 집어삼켜져, 태형은 발걸음조차 옮기지 못했다. 그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적막 속에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듯 말했다. 그 별들이 자신을 연모하는 한 사내의 한 맺힌 진심인지도 모르고 그는 별로부터 영감을 받은 시조를 외고 있었다.
정국아. 차마 아는 척할 수 없어 속으로 삼켜버린 그의 이름에 태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책을 펼쳐보았다. 도롱이가 사라져버린 하늘과 자신 사이의 공백은 창백한 달빛으로 가득했기에 그것에 쓰인 이름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김태형 그리고 전정국. 서로를 알지 못해야 살 수 있는 인연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태형은 황급히 책장을 넘겼다.
"무슨 책을 보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태형은 곧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새끼손가락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붉은 실이 귓가에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정국. 그토록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사랑을 호소했던 아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던지려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아낸 태형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토라지기라도 한 것인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금 질문을 해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터져 나오려는 탄성을 집어삼킨 태형이 간지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옹알이를 하던 그때와 별다를 게 없는 목소리로구나. 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쥐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덮어버린 태형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인세의 더러움이 묻어나지 않은 맑은 눈동자와 마주한 태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이 책 말인가?"
"예. 이 밤중에 선비께서는 무슨 책을 보고 계신 겁니까?"
태형의 대답에 들뜬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던진 정국은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주저앉으며 책 표지를 흘긋 훔쳐보았다.
"세상 사람들의 혼인에 관한 책이라네."
"예? 그런 책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놀란 눈을 한 채 태형의 얼굴과 낡은 책을 번갈아 응시하던 정국은 곧 고개를 끄덕거리는 태형의 반응에 "와아!" 하고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변한 것 없는 목소리와 나이를 먹지 않은 것 마냥 순수한 반응에 웃음꽃을 피운 태형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아. 여러모로 밤은 나를 울게 하는구나. 관심사를 검은 도롱이로 옮긴 정국이 그것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에 흠뻑 취한 태형은 물기 짙은 눈빛으로 그를 눈에 담아내었다.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두 사람의 붉은 실이 서로를 알아차렸기에 더 이상 아픈 기색은 보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 새로운 별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달빛은 점점 옅어지다 못해 이 인연이 다하는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지민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수백 년은 더 놀림감이 되겠구나. 물론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사에 개입하여 직접 인연을 바꾸고 한 인간의 수명을 늘려준 것을 이유로 정국에게 이어진 붉은 실이 끊어지는 순간 그 목숨도 다 한다는 하늘의 엄벌을 묵묵히 받아들였던 태형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정국과 자신이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간다면 그가 단명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정국이 더 성장하기 전에 붉은 실을 자른다면 그는 스물다섯을 넘길 수 있겠지만, 그를 실제로 마주하고 나니 일말의 욕심이 생겼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미소를 지어주는 정국의 곁에 남고 싶었다.
"그럼 그 주머니는 무엇인가요?"
"흐음. 나에게는 흥미가 없는 것처럼 행하니 고작 도롱이와 자루에게 시샘이 나는군."
"예?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옵고 … ."
"하하! 뭘 그리 놀라는가. 농이네. 농. "
토라진 척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심코 내던진 농담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정국과 눈이 마주친 태형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주침이라는 것이 이리도 달콤한 줄 알았더라면. 태형은 여태껏 홀로 버텨온 슬픔 따위는 거뜬히 뒤덮어버리는 행복에 눈가로 몰려드는 눈물을 슬그머니 닦아내었다. 태생부터 이렇게 밝고 붙임성 강한 아이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붉은 실이 이어졌기 때문에 첫 대면부터 허술하게 미소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속에 품은 채 태형은 정국에게 책을 내어주었다.
종이가 엮인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다 낡은 책을 넘겨받은 정국은 신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혼인에 관한 책. 정국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진 책이 비범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태형의 따스한 눈길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책장을 일일이 넘기던 정국은 이내 모든 책장이 텅 비어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책을 잘못 주신 걸까? 태형의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던 탓에 차마 책장이 비어있는 이유를 묻지 못한 정국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만 내뱉었다.
턱을 괸 채 자신의 눈치를 봐가며 고민을 하고 있는 정국의 모습에 태형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태껏 쌓였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커다란 웃음꽃이 피어났다. 뜬금없는 태형의 웃음에 화들짝 놀란 정국은 그의 옆모습을 흘겨보았다. 복사꽃 필 무렵에 은은한 볕이 드는 정자에 앉아 시조를 짓는 여느 신선으로 착각할 신묘한 무엇인가가 서려있는 자태. 책을 넘겨줄 때 저도 모르게 보았던 손가락은 새하얗고 굳은살 하나 없었지만 오랜 세월을 서책만 탐독한 것처럼 지문이 다 닳아있었다. 너무 웃었던 나머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치던 태형과 순간 눈이 마주친 정국은 자신도 모르게 한 이름을 내뱉었다.
"월하노인?"
"어허. 노인은 무슨. 이렇게 어리고 참하게 생긴 노인을 보았는가? 내 입으로 직접 꺼내기는 민망하지만 오랜 벗들은 월하예인이라 부른다네."
"그럼 그 주머니는 … ."
"책에 적혀있는 이들을 이 자루 안에 있는 붉은 실로 한 번 엮어놓으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반드시 맺어진다네."
정국의 질문에 서글픈 표정을 하던 태형이 그에게는 보일 리가 없는 자신의 붉은 실을 어루만지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김태형 그리고 전정국. 정국이 책장에 적혀있는 글자를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태형은 자신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부분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 이제 정국의 수명은 스물다섯. 갓난 아이 시절에 헤어진 뒤 수많은 세월이 지나버린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년 뒤. 태형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잡념을 잊어버리기 위해 미간을 찌푸렸다. 정국과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한 생각만 하고 또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그는 그런 자신의 표정 변화를 정국이 바라보고 있음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월하노인이라 부른 것에 인상을 쓴 것으로 착각한 정국이 움츠러들고 나서야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졌음을 알아차린 태형은 곧 표정을 풀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대뜸 들려오는 태형의 사과에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소리치던 정국은 곧 잠잠해지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월하예인님! 인석아. 귀청 떨어진다. 귀에 대고 자신의 호칭을 부르는 정국의 태도에 태형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어릴 적 옹알이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웅얼거리던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그저 웃음만 비집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제지에도 오히려 더 커진 목청으로 월하예인님이라 외치는 정국에게 패한 태형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내린 건너편 산마루를 향하던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밤하늘을 흐르는 은하수에 걸렸다. 정국을 만나기 직전에 쏘아 올렸던 초신성은 어느새 수많은 별들 사이로 숨어버린 채였다. 정국을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외쳤던 당시의 설움에 따라 반짝이는 정도가 다른 별들이 제 눈으로 들어옴에 괜히 눈을 껌뻑거린 태형이 가슴을 적셔오는 허탈한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깊은 숨을 들이켰다. 추운 계절이 몰고 온 서늘한 바람이 폐부를 향해 들이닥친다.
"밤공기가 차니 자리를 옮겨야겠군."
느린 움직임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도롱이와 자루를 챙기는 태형의 행동에 정국 또한 천천히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억지로 이어 두었던 인연이 너무 짙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태형은 그저 길을 지나가던 도중이었던 정국과 이대로 헤어질 것이라 예상을 했던 건지, 이내 커다랗게 눈을 뜨며 정국을 돌아보았다. 찰나의 행복에 눈이 멀어 가까운 시일 내에 존재하는 서글픈 이별을 돌보지 못한 탓에 태형은 그저 묵묵히 자루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정국을 안전하게 고을로 데려다주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태형은 자신의 곁에서 조용히 걸음을 맞추고 있는 정국의 행동에 쓰라림을 숨겨야 했다. 처음에는 정국이 자신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어 억지로 밝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담백하게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저 한밤중에 달빛을 벗 삼아 책을 읽고 있는 자신에게 호기심을 가진 것뿐이었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조차 과분한 욕심이었나. 그는 서글픔에 잠긴 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상체를 거뜬히 압도하는 자루를 쥐고 마을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을 고려해 단번에 자루를 사라지게 한 태형은 제 손에 쥐고 있는 책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 책마저 사라지면 정국의 환심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정국이 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인상을 쓴 태형은 이내 책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여느 수려한 꽃처럼 일순간에 피고 지는 마음이더라도 족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정국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단번에 꺼져버리는 호롱불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쓰라림이 태형의 안색을 창백하게 비추었다. 자신이 이어주었던 원수지간의 부부가 이토록 가슴 절절해지는 나날을 보냈을까. 정국과 자신은 원수지간은 커녕 서로에게 은혜를 입은 관계임에도 이토록 아파야 하는 것일까.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의문의 바다는 시끄러운 파도 소리에 고초를 호소할 뿐이었다.
"저기 월하예인님!"
"호기심 많은 그대는 또 무엇이 궁금해졌는가."
"그럼 제 배필은 어디 있습니까?"
" …… ."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 커다란 고동소리가 텅 빈 마음에 사무쳤다. 정국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태형이 이를 악물었다. 참으려고 애를 써도 상사병에 무참히 패배한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명 이 아이는 자신의 배필이 여느 양반 댁 여식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의식을 하기도 전에 가득히 차오른 눈물을 몰래 흘려보내기 위해 살며시 고개를 든 태형의 시선이 별빛 가득한 밤하늘에 다다랐다. 미리내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반짝거렸다. 매우 희미하면서도 영롱한 그 빛을 발견한 태형은 눈이 가득 커진 채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의 언덕에서 홀로 사랑을 외칠 때에만 떠오르던 초신성이 다시금 떠오른 것이었다.
그의 처절한 신세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것 마냥 밤하늘로 쏘아올려진 초신성은 그렇게 미리내 속으로 사라진다. 거짓 하나 없는 밤하늘은 야속하기만 했다. 의미 없는 헛웃음을 뱉으며 겨우 고개를 숙인 태형은 이내 잠잠해진 정국의 분위기를 눈치챘다. 나름대로의 근심이 가득 찬 채 일렁거리는 그의 눈빛을 발견한 태형은 그제야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차, 실수를 범하고 말았구나.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대답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크게 상심한 듯 걸음이 느려지는 정국의 모습에 서둘러 온갖 해명 거리를 떠올리던 태형은 순간 떠오르는 옛 추억에 웃음을 내뱉었다.
놀이를 해주지 않았을 때 한껏 토라졌던 갓난 아이, 그리고 궁금한 것을 제때 해결하지 못했을 때 한껏 풀이 죽어버리는 여린 아이. 달라진 것이라고는 더욱더 깊어진 자신의 마음뿐이었는지 한결같은 반응을 보이는 정국의 얼굴에 태형의 얼굴에 미소가 졌다. 처음에는 자신의 배필이 저잣거리에서 침을 발라가며 새끼를 꼬던 말숙이라 태형이 대답을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던 정국은 작게 들려오는 태형의 웃음소리에 저 또한 웃음꽃을 피웠다. 다행이다. 말숙이는 아닌가 봐. 서로 다른 의미의 웃음꽃을 한껏 피워낸 태형과 정국은 그렇게 한 층 더 포근해진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그대가 한 질문 말이네."
"예? 아, 예!"
"훗날 맺어질 배필을 본인에게 말하면 재미가 없지 않은가."
진심을 숨기기 위해 내뱉은 태형의 말을 귀담아들었던 정국은 그제야 풀리는 의구심에 탄성을 내질렀다. 재미가 아니라 진심으로 훗날의 배필을 알고 싶다며 조르고 싶은 마음만큼은 굴뚝같았던 정국은 이내 말을 아끼며 태형과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그의 얼굴에 내린 그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아까의 웃음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이어질수록 태형과 자신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사라지자 정국은 무언가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 감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무엇이 부족한 걸까. 무엇을 빠뜨렸기에 이토록 어색한 걸까.
태형이 손에 꼭 쥐고 있는 낡은 책과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국이 손뼉을 친 것은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의 직업과 다름없는 호칭인 월하예인이라 불렀기 때문에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말이 끊어지는 거라고 생각한 정국은 조금씩 속도를 내며 태형을 지나쳤다. 비밀을 알아낸 것이 있는 사람 마냥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정국을 응시하는 태형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일렁거렸다.
"흠흠. 소생이 너무 들뜬 나머지 인사가 늦어버렸습니다. 소생, 전정국이라 합니다."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태형은 불현듯 들려오는 정국의 소개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공연히 사랑한다 외쳤던 그리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수 없었다. 일개 호기심에서 피어난 인연을 허투루 놓아버릴 수 없었기에 태형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린다.
"태형. 태형이라 불러주게."
"아닙니다! 소생보다 훨씬 높으신 분의 성함을 어찌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자신을 지나쳐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태형을 향해 정국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니. 정국아. 옹알이를 하던 갓난아이 시절의 너는 한껏 만개한 웃음으로 어눌하게나마 내 이름을 불렀다. 가슴 깊은 곳에 억눌렀던 목소리가 눈물을 머금고 호소한다. 어서 정국에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밝히고 네 배필이 될 사람은 여인이 아니라 자신임을 고백하라 한다. 잠시 잊고 있었던 서글픔이라는 감정이 치고 올라옴에 태형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벗이라 하면 벗이라 할 수 있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하면 부모라 할 수 있으며, 정이 통한다 하면 연인이라 할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한낱 신비로운 선비에 불과했다. 그 영원 같았던 세월과 맞바꿔 홀로 짝사랑한 이 앞에서 그 마음을 모르는 척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아픈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말을 편히 하도록 하겠네.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하오나 … "
어서. 태형이라 불러보래도. 다시금 차오르는 아픔을 참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짓던 태형은 코앞까지 다가온 마을 입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정국을 마을 어귀로 접어들기 전까지만 안전하게 데려다주려고 했던 태형은 아까의 대화를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무엇인가를 망설이고 있는 그의 모습에 할 수 없이 마을의 문턱을 넘어섰다. 너는 끝내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구나.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할수록 더 깊어지는 근심의 골에 눈동자를 크게 굴린 태형은 야심한 시각에도 사람의 인적이 끊이지 않는 주막거리로 향했다. 정국은 나름 마을에서 알아주는 양반 댁의 양자였으므로 아무리 나이가 적다고 해도 시비를 걸리거나 할 일이 없다 판단한 탓에 태형은 그저 이 근심을 잠시나마 잊어보고자 주막거리를 거닐었다.
인간들의 세상은 저 혼자만을 빼놓고 즐겁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하루만 묵고 이 마을을 떠나는 나그네를 비롯하여 하룻밤의 유흥을 즐기기 위해 모인 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우울로 가라앉았던 태형의 심리에 거친 물결을 일으켰다. 몰래 집을 빠져나왔을 정국이 서둘러 본가로 돌아갔으리라 판단한 태형의 얼굴은 자신이 혼자가 되었음을 실감하고 나서야 작은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바로 곁에 있으면 너무나도 많은 말을 삼켜야 하기에,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그저 한마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술을 들이켜지 않았음에도 점차 흔적을 지워나가는 근심의 행보에 비로소 미소를 띤 태형이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겨 주막거리 중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어? 월하, 아니, 태형님 지금 웃고 계시는 겁니까?"
" …… ."
"금일은 진귀한 경험을 하게 해주셨으니 소생이 술을 사겠습니다. 마침 객줏집을 겸하는 곳을 알고 있으니 동행을 허해주십시오."
떨어져 있긴 해도 정국의 곁을 지킬 겸 하루를 묵을 객줏집을 찾고 있던 태형은 갑자기 정국이 자신을 가로질러 나타나자 크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집으로 떠났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만의 오산이었는지 아까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게다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 말을 편하게 놓는 것은 무리였던 건지 이름을 부르며 눈치를 보는 게 천진난만한 진돗개를 보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을 흘긴 태형이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을 울게 만들었던 밤이 처음으로 자신을 웃게 만든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이토록 아프게 한 당사자가 코앞에 있음에도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후련해진 마음이 들었다. 정국아.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나. 수도 없이 그와 마주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외면한 채 제 손에 들린 책을 소중히 감싸 쥔 태형이 더욱더 밝아진 미소로 정국에게 알겠다고 답했다.
자신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부추기는 정국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 듯했다. 한껏 들뜬 목소리가 마치 한겨울에 깨어난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숨을 내뱉은 태형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분명 기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에서 시작되는 물줄기 하나가 눈 주변에 아른거린다. 옆에 나란히 서서 고운 손가락으로 골목을 비추는 정국의 어린 모습에 취한 듯 코를 훌쩍인 태형은 여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흩뿌리며 길을 나아가는 태형을 흘겨보는 이들의 눈길조차 이내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에 녹아들어 유한 것으로 뒤바뀌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한 고고한 자의 애통한 심정을 마음 한 구적에 내도록 간직하고 있던 태형이 길게 여운을 남기는 시선으로 정국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두려움 없이는 이승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민의 말을 곱씹으려던 태형은 곧 사람이 북적한 주막집으로 들어서는 정국을 따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그저 한적한 자연을 병풍 삼아 사람들 간의 빨간 실을 이어주기만 했던 그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 홀로 표류하는 외딴섬만 같았다. 주변을 관찰하며 자신이 잡아놓은 자리로 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태형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던 정국은 이내 크게 벌렸던 입을 곧게 닫으며 유한 미소를 지었다. 신비한 서책과 도롱이를 가지고 다니는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진귀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형님. 요깃거리나 특실 중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 나는 됐다. 이렇게 사람 구경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요기를 한 것 같으니 정국이 네가 원하는 것으로 하거라."
" … 태형님은 정말 신기한 분이십니다."
네 생각에도 그렇더냐? 아니. 그게, 주, 주모, 여기 방문주 하나 주시오! 태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에 황급히 시선을 피한 정국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애꿎은 주모를 불렀다.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은 태형은 순수한 표정을 한 채 뜨겁게 달아오르는 볼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정국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걸음을 떼기도 전이었던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분명 영겁을 사는 자신에게 있어서 그 세월은 잠에 한 번 빠져들었다가 깨어나는 것만큼 짧기 그지없었으나, 미리내의 탄생과 종말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처럼 길고도 허무했던 그 공백. 그간 상처받고 아물기를 반복했던 스스로에게 주는 달콤한 휴식인 양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감미로운 음으로 웃음을 흘린 태형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눈이 한 번 열렸다 닫힐 때마다 각막에 맺히는 정국의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일일이 담아놓고자 하는 그의 뜻에 따라 여러 방면의 미소가 뇌리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옥제 곁에 자리한 신들의 인연조차 자신의 손을 거쳐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인연을 원하는 대로 이어갈 수 없는 제 처지에 한탄을 하려다가도, 곧 시야에 들어오는 이 자그마한 소년의 소리 없는 웃음에 모든 근심이 햇살 아래 눈덩이처럼 녹아내렸다. 이 주막의 방문주가 어떠한 맛이라 소문이 났고, 저잣거리에 간혹 찾아오는 사당패가 금일 왔다가 금방 가버렸다는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정국의 입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형이 곧 자신의 앞으로 방문주를 내어주는 중노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정국의 앞에서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제 곁을 하늘거리는 그 수많은 붉은 실 중 하나가 중노미의 손가락에 이어져있었던 탓이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자잘한 상처가 가득 들어선 손가락으로부터 비롯된 붉은 실을 따라 천천히 눈길을 돌리던 태형은 다시금 눈에 들어오는 정국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에 저도 모르게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술이 채워지지도 않은 잔을 매만지며 헛웃음을 뱉었다. 운명을 탓하고 싶어도 탓할 수가 없구나. 다 나의 잘못이다. 술을 대신하여 오감을 가득 채우는 쓰디쓴 감정에 고개를 기울인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가 잦아든 틈새로 들려오는 건너편 나그네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흑나비전傳.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 중 유독 자신의 정신을 일깨우는 그 무엇인가가 화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일 주막 앞에서 물건을 팔던 객상이 글쎄, 마치 흑나비전傳 의 소년을 보는 것만 같았다고 하더이다."
"아, 그 반역으로 몰락한 박 家에서 상화방 *창기를 두고 손님을 받던 기생집 에 팔려간지 하루 만에 죽어서 나갔다고 전해지는 자 말인가?"
"이야기의 근본만 해도 반백이 넘었건만 갑자기 소문이 무성해졌다고 이르더이다. 여느 일패보다 더 아름다운 외관으로 지나치는 사람마다 홀리고 다닌다던데, 말로만 들으면 그게 요물이지,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하! 괜히 자네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자자. 듣는 귀도 많고 보는 눈도 많으니 이야기는 그만하고 한 잔 드세나."
술과 웃음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끝을 맺음과 동시에 그 이면에 존재하는 한 사람을 떠올린 태형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낮말과 밤말을 듣는 새와 쥐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비범한 한 소년의 이야기였다. 달의 이면에 숨은 채 자신의 두려움에 뿌리를 내려 이승에서 살아가는 이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그들을 말리려고 하던 태형은 곧 나그네들의 너머로 보이는 인영人影 을 발견하고는 이내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과연 수백 년이 흘러도 구전되어 살아남은 이야기 속 흑나비 다운 외모를 가진 채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그와 눈을 마주한 태형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박지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태형과 정국을 바라보고 있던 지민은 머리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에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는 태형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물으려던 정국은 자신의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괜찮다고 대답하는 그의 언행에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주막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으로부터 나타난 지민의 시선이 태형으로 인해 기가 죽어버린 정국에게 향했다. 감정이 메마른 듯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지민의 눈에 작은 일렁거림이 일었다. 새끼손가락으로부터 시작되는 빨간 인연에 홀로 사랑을 외치고 아파하기를 반복하던 자신을 바라볼 때의 눈빛과 지금의 눈빛이 비슷함을 깨달은 태형은 곧 손을 뻗어 정국의 술잔을 채워주며 지민의 시선을 막아냈다. 갑작스러운 태형의 움직임에 놀란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정국은 이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바보 같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냥 자신이 좋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는 정국이 너무나도 바보 같았다.
임자. 아직도 미련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듯하지만 언젠가 말한 적 있지 않소.
… 무엇을 말인가.
임자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하는데 어찌 차사가 복날의 개처럼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겠는가.
매양 임자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던 것도 벌써 수백. 또한 그것은 이 미련한 두 인간이 말하는 흑나비전의 근간이 되는 시기. 순식간에 나그네들이 앉은 자리에 나타난 지민이 고운 선을 그리며 올라간 붉은 입술을 축였다. 강에 빠져 죽은 시신처럼 창백하고도 차가운 손으로 나그네들의 술병을 한 번 쓸어올린 지민이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태형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차사라는 말에 입술을 깨문 태형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지민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전적으로 정국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태형의 굳건한 눈빛에 지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존재는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품고 있는 한恨 을 본능적으로 느낀 두 나그네가 괜한 밤바람을 탓하며 몸을 떨었다.
이 몸을 한 번 죽였던 것은 임자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붉은 실이 아닌가.
…… .
뭐. 인간의 태어남과 돌아감조차 쉬이여겼던 임자의 변화는 임자의 벗으로써 기뻐할 일이나, 한 편으로는 절망스럽소.
임자가 버리지 못한 그 미련함이 나를 두 번 죽일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밝은 별이 떠오를 때마다 절망하고 또 절망했지. 나그네들이 앉은 자리로부터 멀어지며 바람이 협곡을 스쳐 지나가듯 유유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지민이 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보통 인간은 볼 수 없는 자신을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보는 사내에게 미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훤칠한 키에 지민만큼 창백한 얼굴. 물결에 흔들리는 잉어의 기다란 꼬리처럼 수려하게 흐드러지는 그의 소맷자락 너머로 나타난 불청객이었다.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남과 동시에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지민의 자취가 점점 옅어지다 이내 밤하늘의 공허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사내의 얼굴이 매우 익숙함을 깨달은 태형이 이름을 입에 담기도 전에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본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밀려드는 사람들의 사이로 녹아들었다. 살아있는 존재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흩어져 버리는 사내의 도포자락을 쫓던 태형의 시선 또한 허무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지민의 얼굴을 향해 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사내가 눈에 담았던 의미를 알아차린 태형은 그저 입을 굳게 다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짧은 찰나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면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 무엇인가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술을 따르던 태형은 잔이 넘치는 것을 발견한 정국이 제 소맷자락을 건들고 나서야 탄성을 내뱉으며 손을 거두었다. 생사가 달린 것은 정국이었으나 차마 그에게 현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태형은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의 순수한 눈을 맞추는 순간 파도처럼 밀려드는 수만 가지의 감정에 한 줌의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해답을 얻었음에서 비롯되는 기쁨도, 해답을 얻지 못했음에서 비롯되는 허탈감도 아니었다. 정국아. 너는 어떻게 해야 좋을 것 같으냐. 그것은 정국을 향한 단순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모. 잠시만 와서 부탁 좀 들어줄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쇤네가 합지요. 어인 일로 부르셨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주모를 부르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정국에게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는 말을 한 태형이 조심스럽게 일어서며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정국아. 아주 잠깐이면 괜찮을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말거라.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불안을 감추기 위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을 뱉은 태형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자리를 떠야 할 일이 생겼으니 중노미를 불러 이 아이의 말동무가 되게 해주십시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학문을 배웠던 탓에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아이이니 중노미만 괜찮다 하면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참. 값은 미리 치르고 갈 테니 그리 알아두십시오. 또한 타인이 없어 잠을 청하기 가장 좋은 곳에서 오래 머무를 예정이니 값은 이것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은화 하나를 꺼내드는 것을 보고서 까무러치게 놀란 주모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를 막아선 태형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미소 지었다. 신뢰를 받기 위해서 이 정도는 되었겠지요. 주모와 마찬가지로 제 자리에 굳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을 지나친 태형은 씁쓸한 표정을 내건 채,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긴 채 사라졌던 사내가 그랬듯이 주막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때 인간들 사이의 인연은 물론이고 신과 신이 만나고 비극적으로 헤어지는 것 또한 상관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가 사무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업이라면 업이요, 후환이라면 후환이었다. 지민과 사내가 사라졌던 곳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다른 인간들의 눈을 속여야 했기에 태형이 억지로 잡아당긴 붉은 실뭉치가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주막으로 돌리게 했다. 영문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주막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로 섞인 태형은 입술이 창백해지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차사가 나섰다. 지민이 처음으로 죽음을 겪었을 때에도 그저 눈물만을 흘리기만 했던 차사가 어떠한 수를 찾았던 것일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상념을 쫓기 위해 인상을 쓰며 머리카락을 헝클인 태형이 불만과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타인을 향한 분노도, 자신을 향한 무한한 불신도 아니었다. 영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단번에 자신에게 들이닥침에 의한 반사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삼라만상의 인연을 이어주고 또 잘라내었던 자신이 제 소지에 난 붉은 실 하나 때문에 오랜 세월을 울고 또 웃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억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울고 상처받으며 지냈던 나날들의 끝에는 정국과 조우하여 통성명을 하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존재했음에 기뻤다. 태형은 이 모순적인 상황에 불현듯 끼어든 차사와 어둑서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나의 업에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허면 … ."
"오랜만에 벗과 대면하였으나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아 섭한 생각이 드는군."
" … 정호석."
사람 없는 언덕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창백한 죽음의 기운을 느낀 태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겨울에 깨어난 검은 나비들이 불에 타오르며 흩뿌연 재를 흩날렸다. 바람과 함께 밀려드는 수많은 생명의 아우성과 동시에 재로부터 나타나는 호석의 형상에 입을 꾹 다문 태형이 다시금 말을 꺼내려던 찰나, 호석의 목소리가 풀벌레조차 숨죽인 고요를 깨뜨렸다.
"그래도 면전에 네가 있으니 형식적인 인사는 하도록 하지."
반갑구나.
이승의 왕조가 바뀔 동안 증오하고 증오했던 나의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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